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쓴 상속 포기 각서가 무효라는 사실은 앞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즉 상속이 개시된 후에 형제들끼리 작성한 상속 포기 각서는 어떨까요?
"장남이 부모님 모셨으니 재산 다 가져가라"라며 동생들이 인감증명서를 떼어주고 각서를 써주었다면,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도 되돌릴 수 없는 걸까요? 오늘은 인천지방법원 2017. 11. 30. 선고 2016가단227495 판결을 통해 상속 개시 후 작성된 상속 포기 각서의 효력과 그에 따른 법적 결과를 상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사건의 배경: "형님이 다 가지세요"라고 해놓고...
1984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남긴 재산을 두고, 어머니와 8남매는 1989년경 한 가지 합의를 합니다. 바로 장남인 원고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기로 한 것입니다. 나머지 형제들(피고들)은 이를 위해 '상속포기용'이라고 용도가 기재된 인감증명서를 원고에게 건네주었고, 일부는 "장남이 상속 재산 일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각서까지 써주었습니다. 원고는 그 대가로 형제들에게 일정 금액의 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2014년, 아버지 명의로 남아있던 일부 땅이 수용되면서 보상금이 나오자 문제가 터졌습니다. 형제들은 "그때 포기한 건 서울에 있는 땅뿐이고, 시골 선산(이 사건 부동산)은 포기한 적 없다"라며 자신들의 지분만큼 등기를 하고 보상금까지 챙겨갔습니다. 이에 장남인 원고는 "무슨 소리냐, 그때 전 재산 다 포기하지 않았느냐"라며 소송을 걸었습니다.
2. 핵심 쟁점과 법원의 판단
① 쟁점 1: '상속 포기 각서'는 특정 재산에만 유효한가?
피고들은 당시 합의가 서울 땅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판단의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피고들이 건네준 인감증명서의 용도란에 '상속포기용'이라고만 적혀있지, 특정 부동산을 지칭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상속 포기란 원칙적으로 상속 재산 전체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므로, 이를 일부 재산에만 한정된 것으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둘째, 일부 피고가 작성한 각서 내용에 "재산 상속 정리 후 장자에게 상속 재산 일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일체'라는 표현은 예외 없이 전부를 의미하므로, 선산만 쏙 빼놓고 합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② 쟁점 2: 구두 합의도 상속재산 분할협의로서 유효한가?
상속재산 분할협의는 반드시 거창한 계약서를 써야만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법원은 상속재산 분할협의는 일종의 계약으로서, 반드시 서면에 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구두로도 가능하다고 판시했습니다.
비록 모든 형제가 한자리에 모여서 도장을 찍은 문서는 없었지만, 인감증명서를 교부하고 각서를 써준 행위, 그리고 원고가 주는 돈을 받고 오랫동안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정황 등을 종합해 볼 때, 묵시적으로나마 "장남이 다 갖는다"는 구두 합의가 성립했다고 본 것입니다.
③ 쟁점 3: 약속한 돈을 다 못 받았다면 합의는 무효인가?
피고들은 "그때 받기로 한 돈을 다 못 받았으니 합의도 무효다"라고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설령 돈을 덜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원고에게 돈을 달라고 청구할 문제일 뿐, 이미 성립한 상속재산 분할협의 자체를 무효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재산 분할 합의와 대가 지급은 별개의 문제라는 논리입니다.
3. 판결의 결과: 되돌릴 수 없는 약속
법원은 피고들이 2014년에 마친 지분 소유권 이전 등기를 모두 말소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즉, 땅의 소유권은 장남인 원고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 것입니다. 또한, 피고들이 이미 받아간 수용 보상금도 부당이득이니 원고에게 돌려주라고 명했습니다.
피고들 입장에서는 수십 년 전 써준 각서와 인감증명서 한 통 때문에, 뒤늦게 생긴 보상금 권리조차 주장하지 못하고 토해내게 된 셈입니다.
4. 결론
이 판례는 상속 개시 후에 이루어진 가족 간의 합의가 얼마나 강력한 효력을 갖는지 보여줍니다.
① 상속 개시 후의 포기 각서는 '상속재산 분할협의서'로서 강력한 법적 효력을 가집니다. "가족끼리 그냥 쓴 건데 뭐 어때"라고 가볍게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칩니다.
② '포기'의 범위는 명확히 해야 합니다. 특정 재산만 포기하는 것이라면 각서에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합니다. 두루뭉술하게 '상속 포기'라고 적으면 전 재산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③ 합의 대가는 확실히 주고받아야 합니다. 나중에 돈을 못 받았다는 이유로 합의 자체를 뒤집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가족 간의 합의도 엄연한 계약입니다. 특히 상속 재산과 관련된 문서를 작성할 때는 그 파급력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며, 모호한 문구 하나가 훗날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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