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재산을 두고 형제간의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혹은 특정 자녀에게 재산을 몰아주기 위해 생전에 미리 '상속 포기 각서'를 작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나는 재산에 욕심 없으니 형님이 다 가지시고, 대신 나중에 딴소리 안 하겠다는 각서 한 장 써드릴게요."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작성된 각서가 나중에 법정에서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오늘은 대법원 1994. 10. 14. 선고 94다8334 판결을 통해 상속 개시 전에 이루어진 상속 포기 약정의 효력과 관련된 법적 쟁점을 명확하게 짚어드리겠습니다.
1. 사건의 배경: "돈 줄 테니 상속 포기해라"
이 사건의 피고(상고인)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자녀였고, 원고들(피상고인)은 다른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피고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인 상속 개시 전에 원고들에게 2,000만 원을 주면서 "앞으로 부모님 재산에 대해 상속분이나 유류분을 일절 주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돈을 미리 주고 상속 포기 각서를 받은 셈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원고들은 약속을 뒤집고 자신의 유류분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피고 입장에서는 "돈까지 받아 가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 신의칙 위반이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과연 대법원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요?
2. 핵심 쟁점과 대법원의 판단
① 쟁점 1: 상속 개시 전의 포기 약정은 유효한가?
대법원은 "효력이 없다"고 단호하게 판결했습니다. 우리 민법상 상속의 포기는 상속이 개시된 후(즉,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만 가능합니다. 또한, 단순히 당사자끼리 각서를 쓰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가정법원에 정해진 기간 내에 신고하는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만 효력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상속이 시작되기도 전에, 즉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미리 작성한 포기 각서는 법적 절차와 방식에 어긋나므로 무효라는 것입니다. 설령 돈을 받고 각서를 썼더라도, 이는 법적으로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약속에 불과합니다.
② 쟁점 2: 돈을 받고 소송을 건 것은 신의칙 위반 아닌가?
피고는 "돈을 받고 포기하기로 해놓고 소송을 거는 건 반칙(신의칙 위반 또는 금반언 원칙 위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상속 포기 약정 자체가 법적으로 무효이기 때문에, 무효인 약정을 근거로 상대방의 권리 행사를 막을 수는 없다는 논리입니다. 즉, 법이 정한 강행규정(상속 포기 절차)을 위반한 약정은 신의칙을 내세워 유효하게 만들 수 없다는 뜻입니다.
3. 결론 및 시사점
이 판결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부모님 생전에 쓰는 상속 포기 각서는 법적으로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공증을 받고, 대가를 지급했더라도 상속이 개시된 후에는 언제든지 무효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재산 분쟁을 미리 막겠다고 생전에 각서를 받는 것은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상속 문제는 가족 간의 정(情)이나 구두 약속만으로 해결하기에는 법적 요건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섣부른 각서 작성보다는 법이 정한 절차를 정확히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훗날의 더 큰 분쟁을 예방하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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